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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이가 적삼 소매와 치마를 걷고 앉아서 부인의 손을 쥐물며,
“얘 영채야, 자 우선 좀 주무르자.”
영채도 병욱과 같이 소매와 치마를 걷고 노파의 뒤로 가며,
“자, 어머니는 좀 일어납시오” 하고 자기가 대신 병인을 안으려 한다.
“웬걸요, 이렇게 전신이 흙투성이야요. 고운 옷에 흙 묻으리다” 하고 좀처럼 듣지 아니한다. 하릴없이 영채는 그 곁에 앉아서 흐트러진 부인의 머리를 거누어 준다. 선형은 앉아서 발과 다리를 주무른다. 구경꾼들이 죽 둘러선다. 세 처녀의 하얀 손에는 누런 흙이 묻는다.
얼마 않아서 형식이가 땀을 흘리며 뛰어오더니,
“자, 저리로 갑시다. 방에 불을 때라고 이르고 왔으니…….”
노파는 눈물을 흘리고,
“생아자 부모라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쇠다. 아이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나” 하고 젊은 사람더러,
“얘, 자 업고 가자” 하며 병인을 일으켜 앉힌다. 젊은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형식의 일행을 실적 보며 병인을 업고 일어난다. 병인은 두 팔로 업은 사람의 목을 쓸어안고 얼굴을 어깨에 비빈다. 형식이가 앞서고 흙 묻은 노파가 한 손으로 병인의 등을 누르고 세 처녀가 뒤로 따라온다. 구경꾼들도 수군수군하면서 한참 따라오더니 하나씩 둘씩 다 떨어지고 말았다.
객주에 들여다가 옷을 갈아입혀 누이고, 일변 형식이가 의사를 불러오며, 일변 세 처녀가 전신을 주물렀다. 노파는 병인의 머리맡에 앉아서 울기만 하더니 가슴이 아프다고 하며 눕는다. 젊어서 가슴앓이가 있었는데 종일 찬비에 몸이 식어서 또 일어난 것이다. 영채와 선형은 태모를 맡고, 병욱은 노파를 맡아서 간호한다. 노파는 한참씩 정신을 못 차리다가도 조곰 정신이 들면,
“이런 은혜가 없어요. 백골난망이외다. 부대 수부귀다남자하고 아들딸 많이 낳고 잘살다가 극락세계에 가시오” 한다. 세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씩 웃었다.
영채와 선형은 땀을 흘리며 태모의 사지를 주무르고 배도 쓸어 준다. 영채의 손과 선형의 손이 가끔 마주 닿는다. 그러할 때마다 두 처녀는 슬쩍 마주본다. 영채가 선형더러,
“제가 부엌에 가서 물을 끓여 올게요” 하고 일어선다. 선형은,
“아니오, 제가 끓이지요!” 하는 것을 영채가 선형의 손을 잡아 앉히며,
“어서 주무르셔요. 제가 끓여 올게” 하고 일어나 나간다. 선형은 물끄러미 영채의 나가는 양을 본다. 그러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선형은 지금 어쩐 영문을 모른다. 병욱은 영채와 선형의 말하는 양을 보고 혼자 빙긋 웃는다.
영채가 물을 끓여 가지고 들어와서 선형으로 더불어 태모의 손발을 씻을 적에 형식이가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의원의 진찰하는 동안에 일동은 삥 둘러서서 의사의 입과 눈만 바라보고 지금껏 말없이 문 밖에 앉았던 젊은 사람도 고개를 디밀어 물끄러미 진찰하는 양을 본다.
“염려할 것은 없소” 하고 의사는 약을 보낸다고 젊은 사람을 데리고 갔다. 태모와 노파는 이제는 적이 정신을 차리고 이따금 괴로워하기는 하면서도 얼마큼 낯빛이 순하게 되었다. 노파는 연방 “이런 은혜가 없어요. 부대 수부귀다남자하라“는 축원을 한다.
노파의 말을 듣건대……
노파는 젊어서 과부가 되어 아들 하나를 데리고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아들이 점점 자라서 며느리도 얻게 되고 남의 땅일망정 농사를 지어 이럭저럭 재미롭게 살 만치 되어 자기 손으로 조고마한 집도 짓고 밭도 한 조각 사게 되었다. 또 며느리가 태중이므로 어서 손자를 안아 보았으면 남부러울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랬더니 어저께 물에 농사 지은 것은 말끔 물 속으로 들어가고 오늘 새벽에는 집까지 물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노파는 흑흑 느끼며,
“집이 떠나가지나 아니했으면 좋겠어요” 한다. 육십 년 근고로 얻은 집이 만일 한번 떠나가고 말면 노파는 생전에 다시 제 집이라 구경을 못 하고 말 것이다. 손자를 안아 보고 제 집 아랫목에서 죽는 것이 노파의 유일한 소원일 것이다. 그 집이란 것이야 팔아도 십 원을 받기가 어렵지마는 이 가족에게는 대궐보다도 더 중한 것이다. 노파의 눈에는 그 돌담 두른 조고마한 집만 보인다. 물결이 그 집을 헐 것을 생각할 때마다 노파는 마치 자기의 살점을 베어내는 듯하였다. 그래서,
“조곰 낙을 볼까 하면 이렇게 됩니다그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자식까지 앙화를 받는지요”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맙시오! 이제 또 잘살게 되지요. 하느님이 아니 계십니까” 하고 영채가 위로를 한다. 그러고는 어젯저녁에 자기가 병욱에게 위로를 받던 생각이 나서 속으로 우스워진다.
“아이구, 이제는 저승에나 가서 잘살는지……” 하다가 중동에 말을 그치고 고개를 번쩍 들어 며느리를 보며,
“얘, 배 아프기가 좀 나으냐. 이 어른들 아니더면 꼭 죽을 뻔했다” 하고 또 수부귀다남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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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은 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에게 면회하기를 청하였다. 서장은 이상한 듯이 병욱을 보더니,
“무슨 일이오?” 한다.
“다른 일이 아니라” 하고, 저 수재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병인도 있고, 태모도 있고, 젖먹이 가진 부인도 있는데, 조반도 못 먹고 비를 맞고 떠는 정경이 가련하며, 더구나 어머니가 무엇을 먹지 못하였으므로 젖이 아니 나서 어린아이들의 우는 양은 차마 못 보겠다는 말을 한 뒤에,
그래서 마침 부산 가는 기차가 비에 걸려서 오후까지 머물게 되었으니, 음악회를 열어 거기서 수입된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국밥이라도 만들어 먹이고 싶다는 뜻을 말하고 허가와 원조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서장은 점점 놀라하는 빛을 보이더니,
“그러면 음악할 줄 아는 이가 있나요?” 하고 감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잘하기야 어떻게 바라겠습니까마는 제가 음악학교에 다닙니다. 그러고 동행하는 여자가 두어 사람 되는데 여학교에서 배운 창가마디나 하고요…….”
서장은 이 말에 지극히 감복하여,
“참 당국에서도 구제 방침을 연구하던 중이외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니까”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참 감사하외다. 허가야 물론이지요” 하고 벌떡 일어나서 모자를 쓰고 나온다.
서장은 일변 정거장에 나가서 역장과 교섭하여 대합실을 회장으로 쓰기로 하고, 일변 순사를 파송하여 각 여관과 시가에 이 뜻을 말하게 하였다. 중간에서 사오 시간이나 기다리기에 답답증이 났던 승객들은 일제히 대합실에 모여들었다. 그 속에는 간혹 흰옷 입은 삼등객도 섞였다. 걸상을 있는 대로 내다 놓고, 근처 여관에서도 걸상을 모아다가 둘러 놓았다. 좁은 대합실은 가득 찼다. 출찰구 곁에 큰 테이블을 놓아서 무대를 만들었다. ‘자선 음악회’라는 말은 들었으나 어떠한 사람이 나오는지 모르는 군중은 눈이 둥글하여 무대만 바라본다. 이윽고 서장이 무대 곁으로 가더니 일동을 둘러보며,
“이렇게 모이시기를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외다. 여러분! 저 산기슭을 보시오. 저기는 수재를 당하여 집을 잃은 불쌍한 동포가 밥도 못 먹고 비에 젖어서 방황합니다. 그런데 아까 (어떤) 아름다운 처녀가 경찰서에 와서 저 불쌍한 동포들에게 한 끼나 따뜻한 밥을 먹이기 위하여 음악회를 열게 하여 달라 합디다. 우리는 그 처녀가 얼마나 음악을 잘하는지를 모르거니와 그의 아름다운 정성이 족히 피 있고 눈물 있는 신사 숙녀 제씨를 감동시킬 줄을 확신합니다” 하며, 서장은 눈물이 흐르고 말이 막힌다. 일동의 얼굴에는 찌르르 하는 감동이 휙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코를 푸는 부인의 소리도 난다. 서장은 말을 이어,
“여러분! 우리는 그 처녀의 정성에 대답함이 있어야 할 것이외다. 이제 그 처녀를 소개합니다” 하고 저편 구석에 가지런히 섰던 세 처녀를 부른다. 바이올린을 든 병욱을 선두로 하여 세 처녀는 은근히 일동에게 경례를 한다. 대합실이 터져라 하고 박수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사람은 감격함이 극하여 소리를 치는 이도 있다.
병욱은 세 사람을 대표하여,
“저희는 음악을 알아서 하려 함이 아니올시다. 다만 여러분 어른께서 동정을 줍시사 함이외다. 더구나 행리 중에 보표(譜表)가 없으니 따로 외워 하는 것이라 잘못되는 것도 많을 것이올시다” 하고 고개를 기울여 바이올린 줄을 고른 뒤에 ‘아이다의 비곡(悲曲)’을 시작하였다. 일동은 잠잠하다. 끊(이)는 (듯 잇는) 듯한 네 줄의 슬픈 소리만 여러 사람의 가슴속을 살살 울린다.
그 곡조는 이러한 경우에 가장 적당한 곡조였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슬픔에 가슴이 눌렸던 일동은 그만 울고 싶도록 되고 말았다. 병욱의 손이 바이올린의 활을 따라 혹은 자주, 혹은 더디게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일동의 숨소리도 그것을 맞추어서 끊었다 이었다 하는 듯하였다. 그 슬픈 곡조를 듣는 맛을 내가 길게 말하는 것보다 천고의 신인 강주사마(江州司馬)의 비파행(琵琶行)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편할 것이다. 애원한 가는 소리가 영원히 끊기지 아니할 듯이 길게 울더니 병욱은 바이올린을 안고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 더한 박수성이 일어나고 한 곡조 더 하라는 소리가 일어난다. 병욱의 얼굴에는 복숭아꽃빛이 비치었다.
다음에는 영채가 병욱에게 배운 찬미가 ‘지난 일 생각하니 부끄럽도다’의 독창이 있었다. 병욱의 바이올린에 맞춰서 영채는 얼굴에 표정(表情)을 하여 가며 부른다.
십여 년 연단한 목소리는 과연 자유자재하였다. 바이올린의 고상한 곡조를 들을 줄 모르던 사람들도 영채의 고운 목소리에는 취하였다. “흐르는 두 줄 눈물 뿌릴 곳 없어” 할 때에는 일동의 눈에는 눈물이 돌았다. 시방 영채가 한문으로 짓고 형식이가 번역한 다음에 노래를 셋이 합창하였다. 그것은 집을 잃고 비에 젖은 불쌍한 사람들을 두고 지은 것인데, 이 노래는 듣는 사람에게 더욱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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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기 보챕니다
젖 달라고 보챕니다
짜도 젖이 아니 나니
무엇 먹여 살리리까
봄에나 여름에나
애써 벌어 놓았던 걸
사정없는 붉은 물결
하룻밤에 쓸어 나가
비가 오고 바람 치고
날새조차 저뭅니다
늙은 부모 어린 처자
집 없으니 어디서 자
따뜻한 밥 한 그릇
국에 말아 드립시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국에 말아 드립시다
순박한 이 노래와 다정한 그 곡조는 마침내 일동의 눈물을 받고야 말았다. 정성되고 엄숙한 박수 소리에 세 처녀는 은근히 경례하고 물러났다. 박수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려 서장이 다시 일어나,
“여러분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다. 본직은 감히 여러분을 대표하여 세 처녀에게 감사한 뜻을 표합니다” 하고 세 사람을 향하여 고개를 숙인다. 세 사람은 답례한다. 일동은 박수한다.
이리하여 한 시간이 못 되는 짧은 음악회가 끝났다. 여러 사람은 즉석에 돈 팔십여 원을 모두었다. 서장은 그 돈을 병욱에게 주며,
“어떻게 쓰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시오” 한다. 이는 병욱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이다. 그러나 병욱은 사양하며,
“그것은 서장께서 맡아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서장은 병욱에게서 그 돈을 받는 듯이 또 한번 고개를 숙이고 일동을 향하여 그 돈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방법을 취하여 수재 만난 사람을 구제하겠노라 하였다. 일동은 병욱과 다른 두 사람의 성명을 듣고자 하였으나 그네는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요, 말이 없었다.
이러하는 동안에 집 잃은 사람들은 여전히 어찌할 줄을 모르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차차 시장증이 나고 몸이 떨리기 시작하였으나 그네에게는 아무 방책도 없었다. 그네는 다만 되어 가는 대로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네는 과연 아무 힘이 없다. 자연의 폭력에 대하여서야 누구라서 능히 저항하리요마는 그네는 너무도 힘이 없다. 일생에 뼈가 휘도록 애써서 쌓아 놓은 생활의 근거를 하룻밤 비에 다 씻겨 내려 보내고 말리만큼 그네는 힘이 없다. 그네의 생활의 근거는 마치 모래로 쌓아 놓은 것 같다. 이제 비가 그치고 물이 나가면 그네는 흩어진 모래를 긁어 모아서 새 생활의 근거를 쌓는다. 마치 개미가 그 가늘고 연약한 발로 땅을 파서 둥지를 만드는 것과 같다. 하룻밤 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발발 떠는 그네들이 어찌 보면 가련하기도 하지마는 또 어찌 보면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네의 얼굴을 보건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無感覺)해 보인다. 그네는 몇 푼 어치 아니 되는 농사한 지식을 가지고 그저 땅을 팔 뿐이다. 이리하여서 몇 해 동안 하느님이 가만히 두면 썩은 볏섬이나 모아 두었다가는 한번 물이 나면 다 씻겨 보내고 만다. 그래서 그네는 영원히 더 부(富)하여짐 없이 점점 더 가난하여진다. 그래서 (몸은 점점 더 약하여지고 머리는 점점 더) 미련하여진다. 저대로 내어버려 두면 마침내 북해도의 ‘아이누’나 다름없는 종자가 되고 말 것 같다.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해서 생활의 근거를 안전하게 하여 주어야 하겠다.
“과학(科學)! 과학!” 하고 형식은 여관에 돌아와 앉아서 혼자 부르짖었다. 세 처녀는 형식을 본다.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科學)을 주어야겠어요. 지식을 주어야겠어요”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거닌다. “여러분은 오늘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 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한참 있다가 병욱이가,
“불쌍하게 생각했지요” 하고 웃으며, “그렇지 않아요?” 한다. 오늘 같이 활동하는 동안에 훨씬 친하여졌다.
“그렇지요, 불쌍하지요!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무론 문명이 없는 데 있겠지요―― 생활하여 갈 힘이 없는 데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영채와 선형은 이 문답의 뜻을 자세히는 모른다. 무론 자기네(가) 아는 줄 믿지마는 형식이와 병욱이가 아는 이만큼 절실하게, 단단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방금 눈에 보는 사실이 그네에게 산 교육을 주었다. 그것은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할 것이요, 대 웅변에서도 배우지 못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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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의 정신은 긴장하였다. 더구나 영채는 아직도 이러한 큰 문제를 논란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제하나?’ 함은 참 큰 문제였다. 이러한 큰 문제를 논란하는 형식과 병욱은 매우 큰 사람같이 보였다. 영채는 두자미며, 소동파의 세상을 근심하는 시구를 생각하고, 또 오 년 전 월화와 함께 대성학교장의 연설을 듣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때에는 아직 나이 어려서 찌찌(분명히) 알아듣지는 못하였거니와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못생기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할 때에 과연 지금 날마다 만나는 사람은 못생긴 사람들이다 하던 생각이 난다. 영채는 그 말과 형식의 말에 공통한 점이 있는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한번 더 형식을 보았다. 형식은, “옳습니다. 교육으로,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하나요?” 하고 형식은 입을 꼭 다문다. 세 처녀는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은 한번 더 힘있게,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고 세 처녀를 골고루 본다. 세 처녀는 아직도 경험하여 보지 못한 듯한 말할 수 없는 정신의 감동을 깨달았다. 그러고 일시에 소름이 쪽 끼쳤다. 형식은 한번 더,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였다.
“우리가 하지요!” 하는 대답이 기약하지 아니하고 세 처녀의 입에서 떨어진다. 네 사람의 눈앞에는 불길이 번쩍하는 듯하였다. 마치 큰 지진이 있어서 온 땅이 떨리는 듯하였다. 형식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앉았더니,
“옳습니다. 우리가 해야지요! 우리가 공부하러 가는 뜻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차를 타고 가는 돈이며 가서 공부할 학비를 누가 주나요? 조선이 주는 것입니다. 왜? 가서 힘을 얻어 오라고, 지식을 얻어 오라고, 문명을 얻어 오라고…… 그리해서 새로운 문명 위에 튼튼한 생활의 기초를 세워 달라고…… 이러한 뜻이 아닙니까” 하고 조끼 호주머니에서 돈지갑을 내어 푸른 차표를 내어 들면서,
“이 차표 속에는 저기서 들들 떠는 저 사람들…… 아까 그 젊은 사람의 땀도 몇 방울 들었어요! 부대 다시는 이러한 불쌍한 경우를 당하지 말게 하여 달라고요?” 하고 형식은 새로 결심하는 듯이 한번 몸과 고개를 흔든다. 세 처녀도 그와 같이 몸을 흔들었다.
이때에 네 사람의 가슴속에는 꼭 같은 ‘나 할 일’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너와 나라는 차별이 없이 온통 한몸, 한마음이 된 듯하였다.
선형도 아까 영채가 “제 물 끓여 올게요” 하고 자기의 손목을 잡아 앉힐 때부터 차차 영채가 정다운 생각이 나고 또 영채가 지은 노래를 셋이 합창할 때에는 영채의 손을 잡아 주도록 정다운 생각이 나고, 또 지금 세 사람이 일제히 “우리지요!” 할 때에 더욱 영채가 정답게 되었다. 그러고 형식이가 지금 병욱과 문답할 때에는 그 얼굴에 일종 거룩하고 엄숙한 기운이 보여 지금껏 자기가 그에게 대하여 하여 오던 생각이 죄송한 듯하다. 자기는 언제까지 형식과 영채를 같이 사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이 형식과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