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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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20장 (6/6)

챕터 6 · 2772단어 · ~14 분 소요

그러고는 또 아까 자기가 영채를 대하여 앉아서 생각하던 혼인생활이 보인다. 회당에서 성례하던 일, 즐거운 가정을 이뤘던 일, 아들과 딸을 낳았던 일이 마치 지나간 사실을 회상하는 모양으로 뚜렷하게 눈앞에 보인다.

“그만 영채가 기생이 되고 말았구나!” 하고 형식은 돌아누우며 자탄하였다. 형식은 이런 생각을 아니하리라 하고 몸을 흠칫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잠이 들리라 하고 일부러 숨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또 생각이 터져 나온다. 슬픈 신세 타령을 하며 눈물 고인 눈으로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영채의 모양이 쑥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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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어여쁜 손가락이 바르르 떨린다. 형식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영채는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사정을 다 말하고 자기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왔던 것이 아닐까. 설혹 몸이 기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형식이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를 그 괴로운 지경에서 건져 내어 달라기 위하여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온 세상에 형식이밖에 말할 곳이 없고 믿을 곳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어 부모를 찾아오는 모양으로, (형제를 찾아오는 모양으로) 형식을 찾아왔음이 아닐까. 아까, ‘제가 이형식이올시다’ 할 때에 영채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담박 눈물을 흘리던 것과 자기의 신세를 말하면서도 연해 연방 형식의 얼굴을 쳐다보던 것을 보니, 영채는 정녕 형식을 믿고 형식의 동정을 구하고, 형식에게 안아 주고 건져 주기를 청한 것이라. 옳다, 영채는 과연 나를 믿고 내게 보호를 청하려고 왔던 것이로다. 육칠 년간이나 차디차디 하고, 괴롭디괴롭디 한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저를 사랑하여 주어야 할 내가 서울에 있음을 알고 반갑고 기뻐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로다. 옳다, 그렇다. 나는 영채를 구원할 의무가 있다. 영채는 나의 은사의 따님이요, 또 은사가 내 아내로 허락하였던 여자라. 설혹 운수가 기박하여 일시 더러운 곳에 몸이 빠졌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건져 낼 책임이 있다. 내가 먼저 그를 찾아다니지 못한 것이 도리어 한이 되고 죄송하거늘, 이제 그가 나를 찾아왔으니 어찌 모르는 체하고 있으리요. 나는 그를 구원하리라. 구원하여서 사랑하리라. 처음에 생각하던 대로, 만일 될 수만 있으면 나의 아내를 삼으리라. 설혹 그가 기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원래 양반의 집 혈속이요, 또 어려서 가정의 교훈을 많이 받았으니 반드시 여자의 아름다운 점을 구비하였으리라. 또 만일 기생이라 하면 인정과 세상도 많이 알았을지요, 시와 노래도 잘할지니, 글로 일생을 보내려는 나에게는 가장 적합하다 하고 형식은 가만히 눈을 떴다. 멍하니 모기장을 바라보고 모기장 밖에서 앵앵하는 모기의 소리를 듣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싱긋 혼자 웃었다. 아까 영채의 태도는 과연 아름다웠다. 눈썹을 짓고, 향수내 나는 것이 좀 불쾌하기는 하였으나 그 살빛과 눈찌와 앉은 태도가 참 아름다웠다. 더구나 그 이야기할 때에 하얀 이빨이 반작반작하는 것과 탄식할 때에 잠깐 몸을 틀며 보일 듯 말 듯 양미간을 찌그리는 것이 (못 견디리만큼 어여뻤다.) 아까 형식은 너무 감격하여 미처 영채의 얼굴과 태도를 자세히 비평할 여유가 없었거니와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영채의 일언 일동과 옷고름 맨 모양까지도 (못 견디게) 어여뻐 보인다. 형식은 눈을 감고 한번 더 영채의 모양을 그리면서 싱긋 웃었다. 도리어 저 김장로의 딸 선형이도 그 얌전한 태도에 이르러서는 영채에게 및지 못한다 하였다. 선형의 얼굴과 태도도 얌전치 아니함이 아니지마는 영채에 비기면 변화가 적고 생기가 적다 하였다. 선형은 가만히 앉았는 부처와 같다 하면, 영채는 구름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선녀와 같다 하였다. 선형의 얼굴과 태도는 그린 듯하고, 영채의 얼굴과 태도는 움직이는 듯하다 하였다. 영채의 얼굴은 잠시도 한 모양이 아니요, 마치 엷은 안개가 그 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모양으로 얼굴의 빛과 눈찌가 늘 변하였다. 그러면서 그 변하는 모양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얌전하였다. 그의 말소리도 정이 자아침을 따라 높았다 낮았다, 굵었다가 가늘었다, 마치 무슨 미묘한 음악을 듣는 듯하였다. 실로 형식과 노파가 그렇게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 것은 영채의 불쌍한 경력보다도 그 경력을 말하는 아름다운 말씨였었다. 형식은 아까 품었던 영채에게 대한 불쾌한 감정을 다 잊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영채의 모양을 대하여 한참 황홀하였다. 형식의 눈앞에 보이는 영채가, ‘형식 씨, 저는 세상에 오직 당신을 믿을 뿐이외다. 형식 씨,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저는 이 외로운 몸을 당신의 품속에 던집니다)’ 하고 눈물 고인 눈으로 형식을 쳐다보는 듯하다. 형식은 마음속으로, ‘영채 씨, 아름다운 영채 씨, 박선생의 따님인 영채 씨, 나는 영채 씨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사랑하면 지하에 누워 계신 그 부친이 오죽이 즐거하실까. 그리하고 일후(만일~일후 : 하고 두 팔을 벌리고 안는 시늉을 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영채의 따뜻한 뺨이 자기의 뺨에 와 스치고 입김이 자기의 입에 와 닿는 듯하였다. 형식의 가슴은 자주 뛰고 숨소리는 높아졌다. 옳다, 사랑하는 영채는 내 아내로다.) 회당에서 즐겁게 혼인 예식을 행하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즐거운 가정을 이루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어디 있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형식은 또 불쾌한 마음이 생긴다. 영채가 어떤 남자와 희학하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남자와~보인다 : 남자에게 안겨 자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 형식이 영채의 자는 방에 들어가니 영채는 어떤 사나이를 꼭 껴안고 고개를 번쩍 들고 형식을 보며, 히히히 하고 웃는 모양이 보인다).

형식은 ‘여보, 영채, 이것이 웬일이오’ 하고 발길로 영채의 머리를 차는 양을 생각하면서 정말 다리를 들어 모기장을 탁 찼다. 모기장을 달았던 끈이 뚝 끊어지며 모기장이 얼굴을 덮는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 모기장을 집어던지고 궐련을 붙였다. 노파는 벌써 잠이 든 듯하고 서늘한 바람이 무슨 냄새를 띄워 솔솔 불어온다. 형식은 손에 든 궐련이 다 타는 줄도 모르고 멍멍하게 마당을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마당으로 뛰어나온다.

교동 거리에는 늦게 돌아가는 사람의 구두 소리가 나고 잘 맑은 여름 하늘에는 별이 반작반작한다. 형식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휙 돌아서며 혼자말로,

“참 인생이란 우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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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형식은 어젯밤 늦게야 잠이 들었던 탓으로 여덟시가 지나서야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영채의 일을 생각하며 조반을 먹을 제, 형식이가 가르치는 경성학교 학생 두 사람이 왔다. 형식은 어느 학생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게 하므로 형식을 따르는 학생이 많았었다. 그 중에도 형식은 자기의 과거의 신세를 생각하여 불쌍한 학생에게 특별히 동정을 표하고, 그러할 뿐더러 그 얼마 아니 되는 수입을 가지고 학비 없는 학생을 이삼 인이나 도와 주었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재주 있는 학생 얌전한 학생을 더욱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무론 아무나 재주 있고 얌전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건마는, 그네는 용하게 그것을 겉에 드러내지 아니하되, 정이 많은 형식은 이러할 줄을 모르고 자기의 어떤 사람에게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 친구가 형식에게, “자네는 편애하는 버릇이 있느니” 하는 충고도 받았다. 그때에 형식은 웃으며, “더 사랑스러운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흠이란 말인가” 하였다. 그러면 그 친구가, “그러나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배우는 자를 하루같이 사랑할 필요가 있느니” 하고 이 말에 형식은, “그러나 장차 자라서 사회에 크게 이익을 주어(줄) 만한 자를 특별히 더 사랑하고 가르침이 무엇이 잘못이랴” 하였다. 이리하여서 형식은 동료간에나 학생간에 편애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혹 어떤 형식을 미워하는 사람은, 형식이가 얼굴 어여쁜 학생만 사랑한다는 말도 한다. 학생 중에도 삼사년급 심술 사납고 장난 잘하는 학생들은, 형식은 얼굴 어여쁜 학생만 사랑하여 시험 점수도 특별히 많이 주고, 질문하는 것도 특별히 잘 가르쳐 준다 하며, 형식이가 특별히 사랑하는 학생을 대하여서는 듣기 싫은 비방도 많이 한다. 그럴 때면 형식의 특별히 사랑하는 학생들이 형식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변명하건마는, 도리어 심술 사나운 학생들은 그네를 비웃었다. 지금 형식을 찾아온 두 학생 중에 십칠팔 세 되는 얌전해 보이는 학생은 형식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 중에 하나이요, 그와 함께 온 키 크고 얼굴 거무테테한 학생은 형식을 미워하는 학생 중의 하나이라. 형식을 사랑하는 학생의 이름은 이희경이니 지금 경성학교 사년급 첫 자리요, 다른 학생의 이름은 김종렬이니, 겨우하여 낙제나 아니하고 따라 올라오는, 역시 경성학교 사년생이라. 그러나 이 김종렬은 낫살이 많고 또 공부에 재주는 없으면서도 무슨 일을 꾸미는 수단이 매우 능란하여 이년급 이래로 그 반의 모든 일은 다 제가 맡아 하게 되고, 그뿐더러 이 김종렬이가 무슨 의견을 제출하면 열에 아홉은 전반 학생이 다 찬성한다. 전반 학생이 반드시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함이 아니로되, 도리어 그의 성적이 좋지 못한 방면으로, 그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방면으로, 그의 성질이 완패하고 심술이 곱지 못한 방면으로, 전반 학생의 미움과 비웃음을 받건마는 무슨 일을 하는 데 대하여는 전반 학생이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를 신임하며 그를 복종한다. 그는 무론 정직은 하다. 속에 있는 바를 꺼림없이 말하며 아무러한 어른의 앞에 가서라도 서슴지 아니하고 제 의견을 발표하는 용기가 있다. 아무려나 그는 일종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로다. 지금은 최상급 학생이므로 다만 사년급에만 세력이 있을 뿐더러, 온 학교 학생간에 위대한 세력을 가져 새로 입학한 일년급 어린 학생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고 그를 보면 경례를 한다. 만일 어린 학생이 자기를 대하여 경례를 아니하면 당장에 위엄 있는 태도와 목소리로, “여보, 왜 상급생에게 경례를 아니하오” 하고 책망한다. 그러므로 어린 학생들은 경례하고 돌아서서는 혀를 내어밀고 웃으면서도 그와 마주 대하여서는 공순히 경례를 한다. 동급생 중에 김계도라 하는, 김종렬과 비슷한 학생이 있다. 김계도는 김종렬보다 좀 온화하고 공손하여 사귈 맛은 있으나 그 일하기를 좋아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점에는 서로 일치한다. 게다가 연치가 상적하고 의취가 상합하므로 김종렬과 김계도 양인은 절친한 지기지우라. 김종렬의 생각에는, 세상에 족히 마음을 허하고 서로 천하를 의논할 사람은 나폴레옹과 김계도밖에는 없다 하였다. 그는 무론 나폴레옹의 자세한 전기도 한 권 읽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서양사에서 얻어들은 재료를 가지고 즉각적으로 나폴레옹은 이러한 사람이어니 하여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을 삼았다.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폴레옹이요, 동창회에서 연설을 할 때에도 나폴레옹이라. 모든 것에 나폴레옹을 인용하므로 학생들은 그를 나폴레옹이라고 별호를 짓고, 얼굴이 검다 하여 그의 별호에 ‘검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검은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게 되고, 혹 영리한 학생은―이희경도 그렇다― 발음의 편의상 ‘검은 나폴레옹’을 줄여 ‘검나, 검나’ 하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이 법국 황제인 줄은 알지마는 원래 지중해 중에 있는 코르시카 섬 사람인 줄은 모른다. 워털루에서 영국 장수 웰링턴에게 패하여 대서양 중 세인트헬레나라는 외로운 섬에서 나폴레옹이 죽었단 말을 역사 교사에게 들었으나, 그는 ‘워털루’라든가 ‘세인트헬레나’라든가 하는 배우기 어려운 말은 다 잊어버리고 다만 나폴레옹은 패하여 대서양 중 어떤 섬에서 죽었다고 기억할 뿐이라. 그러면서도 나폴레옹은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이라. 말하자면 김종렬의 이른바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나고 프랑스에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이 아니라, 김종렬이가 하느님이 자기 모양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전설과 같이 자기 모양으로 나폴레옹을 만든 것이라. 이 나폴레옹 숭배자는 형식에게 인사한 뒤에 엄연히 꿇어앉아, “저희가 선생님을 뵈오러 온 뜻은……” 하고 말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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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궐련을 피워 물고 김종렬과 이희경 두 학생을 웃는 낯으로 대한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 두 학생이 찾아왔는지는 모르거니와 김종렬, 이희경 양인이 함께 온 것을 보니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인 줄은 알았다. 대개 전부터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에는 이 두 사람이 흔히 총대가 됨을 앎이다. 원 격식으로 말하면 최상급의 반장인 이희경이가 으레 그 총대가 될 것이로되, 이희경은 아직 나이 어리고 또 김종렬과 같이 얼굴(일을) 좋아하는 마음과 일을 잘 처리하는 수단이 없으므로 항상 김종렬의 절제를 받는다. 혹 이희경이가 갈 일에도 김종렬은 마치 어린것을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이 아니 놓이는 듯이, 반드시 희경의 뒤를 따라가고, 따라가서는 이 희경이가 두어 마디 말도 하기 전에 자기가 가로맡아 말을 하고 이희경은 도리어 따라온 사람 모양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방긋방긋 웃고만 있을 뿐이다. 이희경은 이렇게 김종렬에게 권리의 침해를 받으면서도 처음은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듯하여 불쾌한 생각도 있었으며(있었으나) 점점 습관이 되매, 도리어 김종렬이가 자기의 할일을 가로맡아 하여 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더러, 혹 자기가 공부가 분주하거나 일하기가 싫은 때에는 자기가 김종렬을 찾아가서 자기의 맡은 일을 위탁하기조차 한다. 그리하면 김종렬은 즉시 승낙하고 저 볼일도 내어놓고 알선한다. 이러한 때마다 이희경은 혼자 웃었다. 이번에 형식을 찾아온 일도 아마 명의상으로는 이희경이가 대표요, 김종렬은 수행원인 줄을 형식은 알았다. 그러고 정작 대표자는 상긋상긋 웃고만 앉았고 수행원인 김종렬이가 입을 열어, ‘저희가 오늘 선생을 찾은 것은’ 함이 하도 우스워서 형식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고 김종렬 같은 사람도 사회에 쓸 곳이 많다 하였다. 저런 사람은 아무 재능도 없으되, 오직 무슨 일이나 하기 좋아하는 성미가 있으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실행하기에 편리하리라 하였다. 김종렬 같은 사람은 조고마한 일을 맡길 때에도 그것을 큰일인 듯이 말하고, 조고마한 성공을 하거든 그것이 큰 성공인 듯이, 사회에 큰 이익이 있는 성공인 듯이 말하고, ‘노형이 아니면 이 일을 할 수가 없소’ 하여 주기만 하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러한 일이나 맡으리라 하였다. 지금 자기가 자기보다 유치하게 보고 철없게 보는 이희경이가 얼마가 아니하여 자기를 부리는 사람이 되고, 자기보다 세상에 더 공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언마는 김종렬은 그런 줄을 모르나니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이 김종렬에게는 행복이라 하였다.

또 학생들이 무슨 일을 의논하여 김종렬을 내어세웠는고 하고 형식은 지극히 은근하게,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녜, 학교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종렬은 이렇게 조고마한 일에도 법률상, 정치상 술어를 쓰기를 좋아하며 또 다른 것을 외우는 재주는 없으되,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인 나폴레옹의 이름이 보나파르트인 줄도 외우지 못하되, 법률상 정치상의 술어는 용하게 잘 외운다. 한번 들으면 반드시 실제에 응용을 하나니, 혹 잘못 응용하는 때도 있거니와 열에 네다섯은 옳게 응용한다. 이번 형식에게 ‘중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것 같은 것은 적당하게 응용한 일례라. 형식은,

“녜, 무슨 중대사건이오?”

“저희는 삼사년급이 합하여 동맹 퇴학을 하려 합니다. 학교의 학생에게 대한 처분 권리를 불만족히 여겨서 이렇게 동맹을 체결한 것이올시다” 하고 동맹 퇴학 청원서를 낸다. 김종렬은 그만 말 두 마디를 잘못 적용하였다. ‘처분 권리’의 ‘권리’는 연문이요, ‘동맹을 체결한다’는 ‘체결’은 너무 굉장하다 하였다. 그러나 한 발이나 되는 퇴학 청원서에 이백여 명이 연명 날인한 것을 보고 형식은 놀랐다. 과연 ‘중대사건’이요, 굉장하게 ‘동맹을 체결하였구나’ 하였다. 김종렬은 퇴학 청원서를 내어 형식을 주며 자기도 형식의 곁으로 가까이 자리를 옮겨 그 글을 낭독하려는 모양을 보인다. 형식은 너무 김종렬의 예절답지 못한 데 불쾌한 생각이 나서 얼른 퇴학 청원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기 혼자만 소리 없이 읽었다. 김종렬이가 또 형식의 책상머리로 따라가려는 것을 이희경이가 웃으며 잡아당기어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김종렬은 이 뜻은 못 알아보고, ‘왜 버릇없이’ 하고 이희경을 흘겨보았다. 이희경은 얼굴이 발개지며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듯 웃었다. 김종렬은 마침내 책상 맞은편에 가서 형식과 마주앉았다. 형식은 또 돌아앉으려다가 차마 그러지도 못하여 청원서를 도로 내어주며,

“종렬군, 그러나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외다. 무슨 이유를 물론하고 학생의 학교에 대한 스트라이크는 좋지 못한 일이외다” 하였다.

김종렬은 스트라이크라는 말의 뜻은 자세히 모르거니와 베이스볼에 스트라이크란 말이 있음을 보건댄, 대체 학교를 공격하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청원서를 접으며 장중한 목소리로,

“아니올시다. 저의 모교 당국은 부패지극(腐敗之極)에 달하였습니다. 차제(此際)를 당하여 저희 용감한 청년들이 일대 혁명을 아니 일으키면 오히려 모교는 멸망할 것이올시다” 하고 결심의 굳음이 말에 보인다. 형식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이희경을 돌아보며,

“희경군도 의견이 그렇소?”

“녜, 어저께 하학 후에 삼사년급이 모여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래, 증거는 확실하오!”

김종렬이가 소리를 높여,

“확실하올시다. 저희 학생 중에서 몇 사람이 바로 목격을 하였습니다.”

하고 주먹을 내어두르며, “증거가 확실하올시다. 그대로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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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퇴학 청원의 이유는 대개 이러하였다. 경성학교의 학감 겸 지리 역사를 담임한 교사인 배명식이 술을 먹고 화류계에 다니매, 청년을 교육하는 학감이나 교사 될 자격이 없을 뿐더러, 또 매양 학생 전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학과의 배당과 기타 모든 것을 자기의 임의대로 하며 학생의 상벌과 출석이 항상 공평되지 못하고 자기의 의사로 한다 함이다. 학감 배명식은 동경고등사범 지리 역사과의 전과를 졸업하고 이삼 년 전에 환국하여 경성학교주 김남작의 청탁으로 대번에 경성학교의 학감이라는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경성학교의 십여 명 교사가 다 중등교원의 법률상 자격이 없는 중에 자기는 당당히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노라 하여 학교 일에 대한 만반 사무는 오직 자기의 임의대로 하였다. 그의 주장하는 바를 듣건대 동경고등사범학교는 세계에 제일 좋은 학교요, 그 학교를 졸업한 자기는 조선에 제일가는 교육가라. 교육에 관한 모든 것에 모르는 것이 없고 자기가 하려 하는 모든 일은 다 교육학의 원리와 조선의 시세에 맞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보기에는 고등사범을 졸업하지 아니한 다른 교사들보다 별로 나은 줄을 모르겠더라. 그는 취임 초에 학과의 변경을 주장하고 지리와 역사는 만학의 집합처라 하여 시간을 배나 늘리고, 수학과 박물은 중등교육에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여 시간 수효를 이삼 할이나 줄였다. 그는 역사 지리 중심 교육론자로라 자칭하여 학생을 대하여서는 역사 지리가 모든 학과 중에 가장 필요하고 귀중한 학과이며, 따라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가장 중요하고 힘드는 교사라 하였다. 그때에 다른 교사들은 총독부의 고등보통교육령과 일본 중학교의 제도를 근거로 하여 배학감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배학감은 웃으며, “여러분은 교육의 원리를 모르시니까” 하고 자기의 학설의 옳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각 중학교에서는 이렇게 학과를 배당하는데” 하고 누가 반대하면, “허, 일본에 큰 교육가가 있소? 참 일본의 교육은 극히 불완전합니다” 하고 자기는 청출어람이라는 격언과 같이 일본서 배워 왔건마는 일본 모든 일류 교육가보다도 뛰어나는 새 학설과 새 교육의 이상을 가졌노라 한다. 마침 배학감의 개정한 학과 배당을 학무국에서 불인가하고 마침내 전에 하던 대로 하게 되매, 여러 교사들은 배학감을 대하여 웃었다. 그리하고 자기네의 승리를 기뻐하였다. 그러나 배학감은 아직 세상이 유치하여 자기의 가장 진보한 학설이 시행되지 아니함이라 하고 매우 분개하였다. 일찍 형식이가 조롱 겸 배학감에게 물었다.

“선생의 신학설은 뉘 학설을 근거로 한 것이오니까. 페스탈로치오니까, 엘렌 케이오니까?”

배학감은 페스탈로치가 누구며, 엘렌 케이가 누군지 한번 들은 듯은 하건마는 얼른 생각이 아니 난다. 그러나 조선 일류 교육가가 삼사류의 교육가가 아는 이름을 모른다 함도 수치라, 이에 배학감은 껄껄 웃으며,

“녜, 나도 푸스털과 얼른커의 학설은 보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 오쿠레(時代運)왼다” 한다. 페스탈로치와 엘렌 케이라는 말을 잊어버려 푸스털, 얼른커라 하리만큼 무식하면서도 그네의 학설을 다 보았다 하는 배학감의 심정을 도리어 불쌍히 여겼다. 그러고 서슴지 않고,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 오쿠레(時代運)왼다’ 하는 용기는 과연 칭찬할 만하다 하고, 형식은 혼자 웃은 일이 있었다. 기실 배학감은 자칭 신학설 신학설 하면서도 대체 학설이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가 고등사범에 다닐 때에 얼마나 도저하게 공부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거니와, 남이 사 년에 졸업하는 것을 오 년에 졸업하였다 하니, 그 동안에 굉장히 공부를 하여 교육에 관한 제자백가서를 다 통독하였는지 알 수 없거니와, 조선에 돌아온 뒤에는 그날그날 신문의 삼면기사나 읽는지 마는지, 독서하는 양을 보지 못하고 독서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일찍 같이 경성학교의 교사로 있는 어떤 사람이 형식을 보고,

“배학감은 백지(白紙)입데다그려.”

“백지라니, 무슨 뜻이오니까.”

“아무것도 쓴 것이 없단 말이야요―무식하단 말씀이야요.”

형식은 껄껄 웃으며,

“노형께서 조곰 모르셨습니다. 배학감은 백지가 아니라, 흑입니다. 검은 종이입니다.”

“어째서요?”

“백지나 같으면 아직은 쓴 것이 없어도 장차야 쓸 수가 있지요. 그렇지마는 흑지는 장차 쓸 수도 없습니다” 하고 서로 웃은 일이 있었다.

배학감은 또 규칙을 좋아한다. ‘규칙적’이란 말과 ‘엄하게’라는 말은 배학감의 가장 잘 쓰는 말이었다. 취임 후 얼마 아니하여 친히 규칙을 개정하였다. 개정이 아니라 이전 있던 규칙은 교육의 원리에 합하지 아니하여 폐지하고 자기의 신학설을 기초로 하여 온통 이백여 조에 달하는 당당한 대규칙을 제정하였다. 어느 날 직원 회의에 교원 일동을 소집하고 친히 신규칙의 각 조목을 낭독하며 일일이 그 규칙의 정신을 설명하였다. 오후 한시에 시작한 것이 넉점이 지나도록 끝이 나지 못하였다. 배학감은 이마와 코에 땀이 흐르고 목이 쉬었다. 교원 일동은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 연방 엉덩이를 들먹들먹하였다. 어떤 교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코를 골다가 학감의 대갈일성에 깊이 든 꿈을 놀라기도 하고, 어떤 교원은 문을 홱 닫치고 뒷간에 한번 간 후에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참다 못하여, “그것은 학교 규칙이 아니라 한 나라의 법률이외다그려” 하고 그 조목이 너무 많음을 공격하였다. 자리에 있던 오륙 인―뒷간에 가고 남은―교원은 일제히 형식의 말에 찬성을 표하였다. 그러나 학감의 직권으로 이 규칙이 확정이 되었다. 배학감과 일반 교원 및 학생과의 갈등이 심하여진 것은 이때부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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