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욱 언니 아니야요?” 한다.
병욱은 놀라 돌아서며 자기보다 이태를 떨어졌던 동창생을 보았다.
“에그, 얼마 만이어!”
“그런데 어디로 가오?”
“지금 동경으로 가는 길인데…….”
“왜, 어느새에…… 여보, 그런데 좀 만나 보고나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정하오” 하고 썩 돌아서더니, “아무려나 내립시오. 우리집으로 갑시다” 한다.
“아니오. 동행이 있어서…… 그런데 누구 작별 나왔소?”
“응, 아니, 언니 모르셔요?”
“무엇을?”
“에그, 저런! 저 선형이 알지요. 선형이가 오늘 미국 떠난다오.”
“선형이가 미국?” 하고 놀란다. 그 여학생은 저편 이등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선 것을 가리키며,
“저기 탔는데…… 이번에 혼인해 가지고 양주가 미국 공부하러 간다오. 잘들 한다. 다 미국을 가느니 일본을 가느니 하는데 나 혼자 이렇게 썩는구먼!”
병욱은 여학생을 따라 선형이가 탔다는 차 앞에까지 갔으나 너무 사람이 많아서 곁에 갈 수가 없다. 선형은 하얀 양복에 맨머리로 창 밑에 서서 전송 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대답하고, 그 곁 창에는 어떤 양복 입은 젊은 신사가 그 역시 연해 고개를 숙여 가며 무슨 인사를 한다. 전송인은 대개 두 패로 갈려서 한편에는 여자만 모이고, 한편에는 남자만 모여섰다. 그 남자들은 모두 다 서울 장안의 문명하였다는 계급이다. 병욱은 한참이나 그것을 보고 섰다가 중로에서 선형을 찾아볼 양으로 그 차실 바로 뒤에 달린 자기의 차실에 올라왔다. 영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아까 탔던 사람은 거의 다 내리고 새로운 승객이 거의 만원이라 하리만큼 많이 올랐다. 어떤 사람은 웃옷을 벗어 걸고, 어떤 사람은 창에 붙어서 작별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벌써 신문을 들고 앉았다. 그러나 흰옷 입은 사람은 병욱과 영채 둘뿐이다. 병욱은 자리에 앉아서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영채더러,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앉었니?”
“어째 남대문이라는 소리에 마음이 이상하게 혼란하여집니다그려. 어서 차가 떠났으면 좋겠다” 할 때에 벌써 종 흔드는 소리가 나고, “사요나라, 고키겐요우” 하는 소리가 소낙비같이 들리더니 차가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어디서, “만세,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인다. 또 한번,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의(사람들이) 두 사람의 창 밖으로 얼른한다. 그것은 모시 두루마기에 파나마 쓴 패였다. 병욱은 아까 선형의 곁에 있던 사람이 형식인 것과, 형식이가 선형의 지아빈 줄도 짐작하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영채는 형식이란 소리를 듣고 문득 가슴이 덜렁 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아무쪼록 형식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방금 같은 기차에 형식이가 탄 것을 생각하매 알 수 없는 눈물이 자연히 떨어진다. 병욱은 영채의 손을 쥐며,
“얘, 울지 말아라. 울기는 왜 우느냐.”
“모르겠어요” 하고 눈물을 씻으며 지어서 웃는다.
용산을 지난 뒤에 병욱은 선형을 찾아갔다. 선형은 병욱의 손을 잡으며,
“이게 웬일이오?”
“동경으로 가는 길이외다. 그런데 미국으로 가신다고요.”
“녜, 편지를 하여 드릴 것인데 동경 계신지, 어디 계신지 계신 데를 알아야지요.”
“나는 아까 남대문에서 우연히 경애 씨를 만나서 그래서 이 차에 타시는 줄을 알았지” 하고 마주앉은 신사에게 인사를 한다. 신사가 답례하면서 앉기를 권한다. 십여 년 영채로 하여금 고절을 지키게 한 형식이란 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기회 있는 대로 형식을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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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혼자 앉아서 생각한다. 첫째, 형식이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건대, 어디 멀리로 가는 것인 듯하다. 나는 그가 이 차에 탄 줄을 알건마는 그는 내가 여기 있는 줄을 모르렷다. 그러고 또 한번 칠팔 년 지나온 생각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한번 쑥 나온다. 팔자 좋은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적되, 슬픈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는 조고마한 기회만 있으면 그 슬픈 과거가 회상이 되는 것이라. 영채는 지금까지에 몇십 번 몇백 번이나 이 슬픈 과거를 회상하였으리요. 하도 여러 번 회상을 하므로 이제는 그 과거가 마치 일편의 소설과 같이 순서와 맥락(脈絡)이 정연하게 되어 어느 끝이나 한끝을 당기면 전체가 실 풀리는 듯이 술술 풀려 나오게 되었다. 칠팔 년간을 하루같이 일념에 형식을 그리고 사모하다가 마침내 형식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려 한 것을 생각하매 형식의 생각이 더욱 새로워지고 정다워진다. 영채는 속으로 ‘한번 더 보고 싶다’ 하였다. 그렇게 생각할수록에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진다. 죽은 줄 알았던 나를 보면, 형식도 응당 반가워하렷다. 만나서 속에 품었던 말이나 실컷 하여도 속이 시원하여질 것 같다. 내가 왜 그때에 형식을 찾아가서 ‘나는 지금토록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소’ 하고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하였던고. ‘나를 사랑해 줄 터이요, 아니 할 테요’ 하고 저편의 뜻을 아니 물어 보았던고. 이제 만나면 서슴지 않고 물어 보리라.
영채는 당장이라도 형식의 탄 차실에 뛰어 건너가고 싶다. 영채의 가슴에는 정히 불길이 일어난다. 그러나 ‘언니께 의논해 보고’ 하고 꿀꺽 참는다.
이때에 차가 수원역에 다다랐다. 바깥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병욱이 선형을 데리고 돌아와서 자기의 곁에 앉히며,
“영채야, 이이는 김선형 씨라는 인데 내 동창이다. 지금 미국 가시는 길이구” 하고 그 다음에는 선형을 향하여, “이애는 박영채인데 내 동생이오” 하고 소개를 한다. 소개를 받은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숙인다. 선형은 박영채가 어떻게 동생인가 한다. 병욱은 영채와 선형을 번갈아 보며 두 사람의 얼굴과 운명을 비교해 본다. 영채도 선형이가 형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모르고, 선형도 무론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칠팔 년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버리려 한 사람인 줄은 알 이치가 없다. 선형은 다만 형식이가 일찍 계월향이라는 계집과 추한 관계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니, 이 박영채가 그 계월향인 줄은 무론 알 리가 없다. 세 처녀 사이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서로 잘 공부를 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장차 힘을 합하여 조선 여자계를 계발할 것과, 공부를 잘하려면 미국을 가거나 일본에 유학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또 영어와 독일어를 잘 배워야 할 것과, 그 다음에는 병욱과 영채는 음악을 배울 터인데 선형은 아직 확실한 작정은 없으나 사범학교에 입학하려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로 각각 크게 성공하기를 빌었다.
차실 내의 모든 사람의 눈은 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세 조선 여자에게로 모였다.
선형이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며(돌아오매), 형식은 선형의 자리에 편 담요를 바로잡아 주며,
“그래 그 동행이 누굽데까?”
“박영채라는 인데 퍽 얌전한 사람이야요. 병욱 씨가 자기 동생이라고 그럽데다.”
형식은 숨이 막히고 몸이 떨리도록 놀랐다. 그래서 눈이 둥그래지며,
“에! (누,) 누구요?” 하고 말이 다 굳어진다. 선형은 웬셈을 모르고 이상한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보면서,
“박영채라고 그래요.”
“박영채, 박영채!” 하고 한참은 말을 못 한다. 그 뒤에 앉았던 우선도 벌떡 일어나며,
“응, 누구? 박영채?”
세 사람은 한참이나 벙어리와 같이 되었다. 우선이가 형식의 곁에 와 앉으며,
“이게 무슨 일이어! 그러면 살아 있네그려! 동성동명이란 말인가.”
형식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더니,
“아무려나, 이런 기쁜 일이 없네” 하기는 하면서도 속에는 여러 가지로 고통이 일어난다. 영채를 따라 평양까지 갔다가 죽고 산 것도 알아보지 아니하고 뛰어와서, 그 이튿날 새로 약혼을 하고, 그 뒤로는 영채는 잊어버리고 지내 온 자기는 마치 큰 죄를 범한 것 같다. 형식은 과연 무정하였다. 형식은 마땅히 그때 우선에게서 꾼 돈 오 원을 가지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야 할 것이다. 가서 시체를 찾아 힘 및는 데까지는 후하게 장례를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새로 혼인을 하더라도 인정상 다만 일년이라도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칠팔 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자기를 위하여 몸을 버리고 목숨을 버린 영채를 위하여 마땅히 아프게 울어서 조상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였는가.
영채가 세상에 없으매 잊어버리려 하던 자기의 죄악은 영채가 살아 있단 말을 들으매 칼날같이 날카롭게 형식의 가슴을 쑤신다. 형식은 이빨을 악물고 흑흑 한다. 곁에 선형이가 앉은 것도 잊어버린 듯하다.
우선은 벌떡 일어나더니 저편으로 간다. 영채의 진부(眞否)를 탐험코자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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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이가 일어선 뒤에 선형은,
“웬일입니까. 박영채가 어떤 사람이야요?” 한다. 그러나 대답이 없으므로,
“왜 박영채 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나요.” 그래도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선형은 형식의 숙인 머리를 보고 앉았더니 혼자말 모양으로,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잠잠한다.
얼마 있다가 형식은 고개를 들더니,
“내가 잘못하였어요. 내가 죄인이외다. 큰 죄인이외다” 하다가 말이 막힌다. 선형은 더욱 의아하여 눈띄가 자주 돌아간다. 형식은 말을 이어,
“벌써 말씀을 드려야 할 것인데 인해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없다는 것보다 내 마음이 약해서 지금껏 잠자코 있었어요. 박영채는 내 은인의 딸이외다. 어려서 그 부친과 오라비, 두 사람은 애매한 죄로 옥중에서 죽고, 영채는 그 부친을 구할 양으로 남에게 속아서 몸을 팔아 기생이 (되었다가……” 할 적에 선형은, “에! 기생이) 되어요?” 하고 놀란다. 계월향이란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녜, 기생이 되었어요. 그로부터 칠 년간” 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 주저하다가, “나를 위하여서 정절을 지켜 왔어요. 무론 나도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그도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몰랐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나 있는 데를 알고 찾아왔습데다” 하고는 그 후에는 어떻게 말을 하여야 좋을는지 생각이 아니 난다. 선형은 아까 본 영채를 생각하고, 그러면 그가 기생이 되어 칠 년간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 사람인가 한다. 자기 생각에 계월향이라 하면 아주 요염(妖艶)하고 음탕한 계집으로 알았더니 이제 본즉 영채는 자기와 다름없는 얌전한 처녀로다. 그러면 어찌하여 형식이가 영채를 버렸는가 하여,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식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자살을 한다고 유서를 써놓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요. 그래서 나도 곧 따라 내려갔지요. 했더니 부지거처지요. 그래서 자기 말과 같이 대동강에 빠져 죽은 줄만 알았구려. 했더니, 그가 지금 살아서 우리와 같은 차에 있소그려” 하고 슬픔을 표하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
“그러면 접때 평양 가셨던 일이 그 일이야요?” 하고 선형은 정면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은 그 눈이 자기를 위협하는 듯하여 눈을 피하면서, “녜” 하였다. 그러고 보면 영채가 죽었다 하는 날은 바로 형식과 자기가 혼인을 맺던 날이라.
선형은 지금까지 가슴속에 오던 의심――즉 형식은 계월향이라는 기생에게 미쳤더라는 의심은 풀렸으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새로운 괴로움이 가슴을 내려누름을 깨달았다. 자기 몸도 무슨 죄에 빠진 것 같고 자기의 앞에는 알 수 없는 어려운 일과 괴로운 일이 가로막힌 것 같다.
이때에 우선이가 엄숙한 얼굴을 가지고 돌아보며 일본말로,
“다시카다요(확실해)” 하고 형식의 곁에 앉으며, “참 희한한 일일세.”
“그래, 가서 말해 보았나?”
“아니, 문에서 앉은 것이 보이데. 아까 여기 왔던 이하고 무슨 말을 하는데……” 하다가 선형이 곁에 앉은 것을 보고 말 아니 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는 듯이 말을 뚝 그쳤다가, “아무려나 잘되었네. 지금 그 여학생과 같이 동경으로 가는 모양이니까, 아마 공부하러 가는 게지.”
형식은 걸상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눈을 감는다.
영채는 선형의 돌아간 뒤에,
“언니, 웬일인지 나는 가슴이 몹시 설렙니다.”
“왜, 이형식 씨란 말을 듣고?”
“응, 여태껏 잊고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잊은 것이 아니야요. 가슴속에 깊이깊이 숨어 있던 모양이야요. 그러다가 이형식 군 만세라는 소리에 갑자기 터져나온 것 같습니다. 아이구, 마음이 진정치 아니해서 못 견디겠소.”
“아니 그렇겠니. 어쨌든 칠팔 년 동안이나 밤낮 생각하던 사람을 그렇게 어떻게 쉽게 잊겠니? 이제 얼마 지나면 잊을 테지마는…….”
“잊어야 할까요?”
“그럼 어찌하고?”
“안 잊으면 아니 될까요?”
병욱은 물끄러미 영채를 보더니 영채의 곁에 가 앉아서 한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형식 씨가 벌써 혼인을 하였다. 지금 동부인하고 미국 가는 길이란다.”
“에? 혼인?” 하고 영채는 병욱의 팔을 잡는다. 병욱은 위로하는 소리로,
“아까 여기 왔던 선형이라는 이가 그의 부인이란다.”
“그러면 그때에 벌써 약혼을 하였던가” 하고 지나간 일에 실망을 한다. 자기의 지나간 생활이 더욱 슬퍼지고 원통하여진다. 자기는 세상에 속아서 사나마나 한 생활을 해온 것 같고 지금껏 전력을 다하여 오던 것이 아무 뜻이 없는 것 같아서 실망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더구나 자기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형식을 생각하여 왔거늘 형식은 자기를 초개같이밖에 아니 여기는 것 같다.
“언니, 왜 그런지 원통한 생각이 나요.”
“그러나 장래가 있지 않냐” 하고 힘껏 영채를 안아 준다.
🙝 🙟
형식은 즉시 영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전에 보았던 영채의 얼굴은 다 잊어버린 듯하여 꼭 한번 새로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꼭 죽은 줄 알았던 영채의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차마 영채를 보러 갈 용기가 아니 난다. 형식은 선형의 얼굴을 보았다. 선형은 무슨 실망한 일이나 있는 듯이 반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다. 그러다가 이따금 형식을 슬쩍 보고는 불쾌한 듯이 도로 눈을 감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기도 한다. 선형의 눈과 형식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형식의 몸에는 후끈후끈하는 기운이 돈다.
같은 차실에 있는 승객들은 대개 잠이 들었다. 형식도 뒤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고 아무 생각도 아니 하리라 하는 듯이 한번 몸을 흔들고 두 손을 마주잡아 배 위에 놓았다. 그러나 형식의 마음은 형식의 뜻을 좇지 아니하고 폭풍에 물결치는 바다와 같았다.
영채는 꼭 죽었어야 할 것이다. 살아 있더라도 자기가 몰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선형과 약혼이 되기 전에 만났어야 할 것이다. 약혼이 성립되고 미국을 향하고 떠나는 길에 만나게 한 것은 진실로 조물의 장난이다. 형식은 결코 영채를 버리려 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오랫동안 영채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겸하여 다시 영채를 만날 때에는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유연히 솟아나서 속으로 영채와 혼인할 일과 혼인한 후에 즐거운 생활을 할 것과 아름다운 자녀를 낳아 이상적으로 기를 것까지 생각하였고, 또 영채가 기생인 줄을 안 뒤에는 돈 천 원을 얻지 못하여 종일 번민한 일도 있었다. 만일 영채가 평양에만 가지 아니하였던들, 죽으러 가노라는 유언만 없었던들 자기는 마땅히 영채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은사(恩師)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고 칠팔 년간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온 영채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였을 것이다.
형식은 또 영채와 선형을 비교하여 보았다. 선형은 형식이가 일생의 처음 접한 젊은 여자요, 또 선형의 자태는 누가 보아도 황홀할 만하므로 형식에게 극히 깊고 강한 인상(印象)을 주었다. 그래서 처음 젊은 여자를 접하여 보는 젊은 남자가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형식은 선형을 세상에 다시 없는 여자로 여겼다. 다만 그 외모가 아름다울 뿐더러 그 정신까지도 외모와 같이 아름다우리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대하여 본 첫날에 선형에게 여자에 관한 모든 아름다운 덕을 붙였다. 선형은 형식의 눈에는 더할 수 없이 완전하고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렇게 강한 인상을 얻은 그날 저녁에 다시 영채를 보았다. 영채의 외모도 물론 아름다웠다. 공평한 눈으로 보건대 영채의 얼굴이 차라리 선형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형을 천하 제일로 확신한 형식은 영채를 제이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형은 부귀한 집 딸로서 완전한 교육을 받은 자요, 영채는 그 동안 어떻게 굴러다녔는지 모르는 계집이라. 이 모든 것이 합하여 형식에게는, 영채는 암만해도 선형과 평등으로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다만 선형은 자기의 힘에 미치지 못할 달 속에 계수나무 가지요, 영채는 자기가 꺾으려면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매화 가지였다. 그러므로 형식이가 제일로 생각한 선형을 버리고 제이로 생각하는 영채를 취하려 하였던 것이라. 그러다가 영채가 대동강에 빠지고, 게다가 김장로가 혼인을 청하매 형식은 별로 주저함도 없이 약혼을 허하였고 또 슬퍼함도 없이 영채를 잊어버리려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