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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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장~100장 (6/6)

챕터 30 · 1478단어 · ~8 분 소요

“선형 씨, 한마디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하고 형식은 고개를 숙였으나 선형은 고개를 들어 형식의 갈라진 머리를 보고 의심나는 듯이 한참 생각하더니,

“무슨 말씀이야요?” 하고 살짝 얼굴을 붉힌다.

“제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이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꺼리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는 형식의 가슴은 자못 울렁울렁한다. 사생이 달린 큰 판결이 몇 초 안에 내리는 듯하다. 선형도 아직 이렇게 책임 중한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으므로 형식의 말에 무서운 생각이 난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모르면서 간단히, “녜” 하였다. 약혼하던 날 대답하던 ‘녜’와 다름이 없는 ‘녜’로다. 형식도 더 말하기가 참 어려웠다. 또 그 대답이 무섭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형의 참뜻을 모르고 의심 속으로 지내기는 더 무서웠다. 그래서 우선의 ‘사내답게’ 하던 말을 생각하고 기운을 내어,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선형 씨는 나를 사랑합니까?” 하고는 힘있게 선형의 눈을 보았다. 선형도 하도 뜻밖에 질문이라 눈이 동그래진다. 더욱 무서운 생각이 난다. 실로 아직 선형은 자기가 형식을 사랑하는가 않는가를 생각하여 본 적이 없다. 자기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권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자기는 이미 형식의 아내다. 그러면 형식을 섬기는 것이 자기의 의무일 것이다. 아무쪼록 형식이가 정답게 되도록 힘은 썼으나, 정답게 아니 되면 어찌하겠다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한 일이 없었다. 형식의 이 질문은 선형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래서 물끄러미 형식을 보다가,

“그런 말씀은 왜 물으셔요?”

“그런 말을 물어야지요. 약혼하기 전에 서로 물어 보았어야 할 것인데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물어야지요.”

선형은 잠자코 앉았다.

“분명히 말씀을 하십시오. 오냐라든지 아니라든지…….”

선형의 생각에는 그런 말은 물을 필요도 없고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이미 부부가 아니냐. 그것은 물어서 무엇 하랴 한다. 그래서 웃으며,

“왜 그런 말씀을 물으셔요?”

“하루라도 바삐 아는 것이 피차에 좋지요. 일이 아주 확정되기 전에…….”

“에? 확정이 무슨 확정입니까.”

“아직 약혼뿐이지 혼인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직 잘못된 것을 교정할 여지가 있지요.”

선형은 더욱 무서워서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의 말하는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약혼했던 것을 깨트린단 말씀입니까?” 하는 선형의 눈에는 까닭 모르는 눈물이 고인다. 형식은 그것을 보매 이러한 말을 낸 것을 후회하였으나,

“녜― 그 말씀이야요.”

“왜요?”

“만일 선형 씨가 나를 사랑하시지 아니하면…….”

“벌써 약혼을 했는데두?”

“약혼이 중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무엇이 중합니까.”

“사랑이지요.”

“만일 사랑이 없다 하면?”

“약혼은 무효지요.”

🙝 🙟

선형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선생께서는?”

“제야 선형 씨를 사랑하지요. 생명보다 더 사랑하지요.”

“그러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오. 선형 씨도 저를 사랑하셔야지요.”

“아내가 지아비를 아니 사랑하겠습니까.”

형식은 물끄러미 선형을 본다. 선형은 고개를 숙인다.

“그것은 뉘 말입니까.”

“성경에 안 있습니까.”

“그렇지마는 선형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형 씨의 진정으로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합니까, 또는 사랑하니까 아내가 됩니까.”

이것도 선형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마찬가지 아닙니까.”

‘마찬가지’라는 말에 형식은 놀랐다. 그것이 어찌하여 마찬가질까. 이 계집애는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할 줄을 모르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일언이폐지하고,

“한마디로 대답해 줍시오…… 저를 사랑하십니까” 하는 소리는 얼마큼 애원(哀願)하는 듯하다. ‘아니오’ 하는 대답이 나오면 형식은 곧 죽을 것 같다. 꼭 다문 선형의 입술은 형식의 생명을 맡은 재판장의 입술과 같다. 선형은 이제는 머리가 혼란하여 더 생각할 수가 없다. 형식의 비창한 얼굴을 보매 다만 무서운 생각이 날 따름이다. 그래서 다만,

“녜!” 하였다. 형식은 한번 더 물어 보려 하다가 ‘녜’가 변하여 ‘아니오’가 될 것이 무서워서 꾹 참고 갑자기 선형의 손을 쥐었다. 그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마치 형식의 손에 녹아 버리고 마는 듯하였다. 선형은 가만히 있다. 형식은 한번 더 힘을 주어서 선형의 손을 쥐었다. 그리하고 선형이가 마주 꼭 쥐어 주기를 바랐으나 선형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다. 형식은 얼른 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왔는지 형식도 모른다. 선형은 인사도 아니 하고 형식의 나가는 양을 보았다.

선형은 책상에 기대어서 눈을 감고 혼자 생각하였다. 형식이가 하던 말이 분명하게 생각이 난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을 어떻게 하는가. 부끄럽지도 아니한가. 이러한 말을 부끄럼 없이 하는 형식은 암만해도 단정한 남자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이 기생집에 가서 기생과 하던 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가 형식에게 욕을 당한 것 같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든지 동포를 사랑한다든지 부부는 서로 사랑할 것이라든지 하면, 그 사랑이란 말이 극히 신성하게 들리되, 남자가 여자에게 대하여, 또는 여자가 남자에게 대하여 사랑해 주시오 한다든지, 나는 사랑하오 한다든지 하면 어찌해 추해 보이고 점잖지 아니해 보인다. 선형이가 지금껏 가정과 교회에서 들은 바로 보건대, 다른 모든 사람은(사랑은) 다 거룩하고 깨끗하되 청년 남녀의 사랑만은 아주 불결하고 죄악같이 보인다. 선형은 사랑이란 생각과 말이 원래 남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인 줄을 모른다. 이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관한 말은 적지 않게 선형을 불쾌하게 하였다. 선형의 생각에 자기의 지아비는 극히 깨끗하고 점잖은 사람이라야 할 터인데 그러한 소리를 염치없이 하는 형식은 죄인인 듯하다. 더러운 기생에게 하던 버릇을 내게다가 했구나 하고 선형은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형식이가 잡았던 손을 보았다. 그 큰 손 속에 자기의 손이 푹 파묻혔던 것과 자기의 손을 아프도록 힘껏 쥐어 주던 것을 생각하고 선형은 무엇이 묻은 것을 떨어 버리는 듯이 손을 서너 번 내어두르고 치마로 문대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본즉, 사랑하여 준다는 말과 손을 잡아 주던 맛이 아주 싫지도 아니하였다. 그뿐더러 형식이가 힘껏 손을 꼭 쥘 때에는 전신이 찌르르 떨리는 듯이 기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다시 그 손을 내어들고 보다가 방그레 웃으며 가만히 입에 대어 보았다. 또 선형은 생각하였다. 자기는 과연 형식을 사랑하는가.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니까 그 지아비의 아내가 되었느냐’ 하던 말과 ‘만일 사랑이 없다 하면 약혼은 무효지요’ 하던 형식의 말을 생각하였다. 만일 그렇다 하면 부모의 명령은 어찌하는가. 내가 형식에게 사랑이 없다 하면 ‘나는 형식에게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모께서 정해 주신 이 혼인은 거절합니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주장하신 신성한 것이니까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의 말을 잘못이다. 형식의 말은 깨끗지 못한 말이다. 그러나 자기는 형식의 아내다. 결코 사람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형식의 아내다.

선형은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암만해도 마음이 정치 못하여 다시 책상에 기대어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이시여, 죄 많은 딸의 죄를 용서하시고 갈 길을 밝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고 잠깐 주저하다가, “제 지아비를 정성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 🙟

하루는 병욱이가 혼자 앉아서 한 손으로 곁에 뉘어 놓은 바이올린을 되는 대로 울리며 영채에게 배운 {고문진보}를 읽을 적에 어디 갔다 오는 병국은 한 손에 파나마를 들고 부채를 부치며 들어와서 병욱의 방 문지방에 걸어앉으며,

“요새에는 또 한시(漢詩)에 미쳤구나. 이제는 음악은 내버리고 한시 공부나 하지” 하며 웃는다.

“왜요? 이렇게 손으로는 음악하고 눈으로는 시를 읽지요” 하고 자주 바이올린 줄을 울리며 아이들 모양으로 몸을 흔들고 소리를 내어서 시를 읽는다.

병국은 병욱의 몸 흔드는 양을 보고 웃고 앉았더니,

“손님은 어디 가셨니?” 한다.

(병국은 영채를 손님이라고 부른다.) 병욱은 고개를 번쩍 들고 웃으면서,

“손님 어디 오셨어요. 어디서 왔나요?”

병국은 누이가 자기를 조롱하는 줄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아, 그이 말이다.”

“아, 그이가 누구 말이야요?” 병욱은 병국이가 영채를 위하여 괴로워하는 줄을 알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병국은,

“그만두어라” 하고 휙 돌아앉는다. 병국은 견디지 못하여 일어서서 나가랸다. 병욱은 뛰어나와 병국의 소매를 당기며,

“오빠, 들어오십시오. 내가 잘못했으니.”

“싫다, 어디 가야겠다” 하고 팔을 잡아챈다. 병욱은 깔깔 웃으며,

“글쎄 여쭐 말씀이 있으니 여기 좀 앉으셔요” 하는 말에 병국은 또 앉았다. 병욱의(병욱은) 손으로 병국의 등에 붙은 파리를 잡으며,

“오빠, 무슨 근심이 있어요?” 하고 웃기를 그치고 병국의 얼굴을 모로 본다. 병국은 놀라는 듯이 고개를 돌려 병욱을 보며,

“아니, 왜? 무슨 근심 빛이 보이니?”

“녜, 어째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애요” 하고 ‘나는 그 근심을 알지’ 하는 듯이 생긋 웃는다. 병국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웃으면서,

“양잠회사를 꼭 세워야 하겠는데 아버지께서 허락을 아니 하시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그 일로 갔다가 오는 길이다. 너는 바이올린이나 뽕뽕 울리고, 나는 돈을 벌어야지…….”

병욱은 한 걸음 물러서서 다른 데를 보며 비웃는 듯이,

“흥, 그것이 근심입니다그려. 내가 돈을 너무 써서. 그렇거든 그만둡시오.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공부하지요. 여자는 저 먹을 것도 못 번답디까.” 병국은 껄껄 웃으며,

“잘못했소, 누님. 그렇게 성내실 게야 있소? 제가 남을 조롱하니까, 나도 당신을 조롱하지요.”

병욱은 다시 병국의 곁에 와 서며,

“그것은 농담이구요” 하고 앉아서 몸을 우쭐우쭐하며 소리를 낮추어, “오빠, 나 영채 데리고 동경 가요. 좋지요?”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고 극히 냉정한 체하나 벌써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말을 왜 하니?”

“일간 가게 해주셔요. 집에 있기도 싫고 또 영채를 데리고 가면 입학 준비도 해야지요. 그러니까 곧 떠나게 해주셔요” 하고 유심하게 병국을 본다. 병국은 누이의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그러고 누이의 정을 더욱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만으론 확실치 못하므로,

“글쎄, 개학이 아직도 한 달이 있는데, 왜 그렇게 빨리 간다고 그러느냐.”

병욱은 형(오라비)의 눈을 이윽히 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어서 가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하는 말에 병국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그렇다. 영채가 오래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는 괴로울 것이요, 또 미상불 위험도 없지 아니할 것이라. 자기도 그러한 생각이 있기는 있었다. 자기가 어디로 여행을 가든지 영채를 어디로 보내든지 하는 것이 좋을 줄을 알기는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끄는 힘이 있어서 실행을 못 하였다. 병국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옳다,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야 한다” 하고는 휘 한숨을 쉰다. 병욱은 형(병국)의 어깨를 만지며,

“영채도 오빠를 사랑하니 동생으로 알고 늘 사랑해 주십시오. 저도 제 동생으로 알고 늘 같이 지내겠습니다. 동경 가면 둘이 한집에 있어서 밥 지어 먹고 공부하지요. 불쌍한 사람을 건져 주는 것이 안 좋습니까. 또 영채 씨는 좀더 공부를 하면 훌륭한 일꾼이 되겠는데요.”

병국은 고개를 숙인 대로 누이의 말을 듣더니 손으로 무릎을 치고 몸을 쭉 펴면서,

“잘 생각하였다. 네게야 무엇을 숨기겠니. 실로 그 동안 퍽 괴로웠다” 하고 또 잠깐 생각하다가 한번 더 결심한 듯이, “그러면 언제 떠나겠니?”

“글쎄요, 오빠께서 가라시는 날 가지요.”

“그러면 모레 낮차에 가거라. 내일 노자를 얻어 줄 것이니.”

이때에 영채가 대문 밖으로서 뛰어들어오다가 병국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병국도 얼른 일어나서 답례한다. 영채는 뒷산에서 뜯어온 붓꽃〔花菖蒲〕 한줌을 병욱에게 준다. 병욱은 그 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더니 절반을 갈라 들며,

“이것은 오빠 책상 위에 꽂아 드려요. 이것은 우리 둘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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