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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항상 입버릇 모양으로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였다. 자기는 진실로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한 것이언마는, 학생들은 이전에는 그것이 다만 형식의 겸사에 지나지 못하거니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학생들은 그 한탄이 참인 줄로 안다. 그래서 형식의 하는 말에도 전과 같이 신용을 주지 아니하게 되었다. ‘나는 지식과 수양이 부족하외다’ 하는 말을 형식이가 자기네를 두려워하여 사죄하는 말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형식은 그러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설혹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아직은 희경 일파에게 떨어지기를 무서워할 지경은 아니었다. 형식의 보기에 희경 일파는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네가 자기를 따라오려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음질을 하더라도 여간 육칠 년 내에 따라잡힐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한 사상을 가진 선각자로 자신한다. 그래서 겸손한 듯한 그의 속에는 조선 사회에 대한 자랑과 교만이 있다. 그는 서양 철학도 보았고 서양 문학도 보았다. 그는 루소의『참회록(懺悔錄)』과『에밀』을 보았고, 셰익스피어의『햄릿』과 괴테의『파우스트』와 크로포트킨의『면포(麵匏)의 약탈(掠奪)』을 보았다. 그는 신간 잡지에 나는 정치론과 문학평론(文學評論)을 보았고 일본 잡지의 현상소설에 상도 한번 탔다. 그는 타고르의 이름을 알고 엘렌 케이 여사(女史)의 전기(傳記)를 보았다. 그러고 우주(宇宙)도 생각하여 보았고 인생(人生)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에게는 자기의 인생관(人生觀)이 있고, 우주관(宇宙觀), 종교관(宗敎觀), 예술관(藝術觀)이 있고 교육에 대하여서도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줄로 자신한다. 그가 만원 된 차를 타고 눈앞에 욱적욱적하는 사람을 볼 때에 나는 저들의 모르는 말을 많이 알고, 모르는 사상을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고는 일종 자랑의 기쁨을 깨닫는 동시에 ‘언제나 저들을 나만큼이나마 가르치는가’ (하는) 선각자의 책임을 깨닫고 또 이천만이나 되는 사람 중에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뜻을 이해(理解)하는 자가 몇 사람이 없구나 하는 선각자(先覺者)의 적막(寂寞)과 비애(悲哀)를 깨닫는다. 그러고 자기의 하는 말을 알아들을 만한 친구를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형식은 열 손가락을 다 꼽지 못한다. 그러고 이 열도 못 되는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 신문명(新文明)을 이해하는 선각자요, 따라서 온 조선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어 낼 자라 한다. 그러고 지나간 사 년간에 자기가 희경 등 사오 인을 자기와 같은 계급에 끌어낸 것을 더할 수 없는 만족으로 여긴다. 무론 자기보다는 어린아이로되 다른 사람들에게 비기면 어른이요, 선각자라 한다. 조선 안에 학교도 많고 학생도 많되 희경 일파만한 학생은 없다 하며, 따라서 교육자 중에 자기가 홀로 신문명을 이해하고 조선 전도를 통견(洞見)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생각한다. 서울 안에 수백 명 되는 교사는 모두 다 조선인 교육의 의의(意義)를 모르고 기계 모양으로 산술을 가르치고, 일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인 교육계에 대하여 항상 불만한 생각을 품는다. 그가 경성교육회라는 것을 설립할 양으로 두어 달을 두고 분주한 것도 이러한 기관을 이용하여 자기의 교육에 대한 이상(理想)을 선전(宣傳)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다른 교사들은 형식을 그처럼 지식과 사상이 높은 자라고 인정하지 아니하였고, 어떤 사람은 형식을 자기네와 평등이라고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과연 형식의 하는 말에나 일에는 별로 뛰어난 것이 없었다. 형식이가 큰 진리인 듯이 열심으로 하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는 별로 감동을 주는 바가 없었다. 다만 형식의 특색은 영어를 많이 섞고 서양 유명한 사람의 이름과 말을 많이 인용하여 무슨 뜻인지 잘 알지도 못할 말을 길게 함이었다. 형식의 연설이나 글은 서양 글을 직역한 것 같았다. 형식의 말을 듣건대 이러한 말이나 글이 아니고는 깊고 자세한 사상을 발표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좇지 아니함은 그네가 자기의 사상을 깨달을 힘이 없음이라 하여 혼자 분개하여 한다. 공평하게 말하면 형식은 다른 교사들보다 좀더 진보한 점이 있고, 또 자기가 믿는 바를 어디까지든지 실행하려 하는 정성은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마음을 보는 법이 어두웠다. 그의 생각에 세상 사람의 마음은 다 자기의 마음과 같아서 자기가 좋게 생각하는 바는 깨닫기만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좋게 보이려니 한다. 일언이폐지하면 그는 주관적(主觀的)이요, 이상(理想)의 인(人)이요, 실제(實際)의 인(人)은 아니외다.
그의 지나간 사 년간의 교사생활은 실패의 생활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출하였으나 별로 채용된 것이 없었고, 학생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가르치고 시키는 바가 있었으나 별로 환영되지도 아니하였고, 무론 실행된 것은 별로 없었다. 형식은 이것을 보고 분개한 적도 있고 비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자기가 부족함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이 아직 자기의 높은 사상을 깨닫지 못함이라 하여 스스로 선각자의 설움이라 일컫고 혼자 안심하였다. 그러나 남들이 형식의 의견을 채용치 아니함은 자기네가 그것을 깨닫지 못함이라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그네의 보기에 형식의 의견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것이요, 또 설사 실행한다 하더라도 효력이 없을 듯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도 차차 형식의 지식이 (꽤) 많음과 어려운 책을 많이 보고 생각이 (꽤) 깊은 줄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농담삼아, 칭찬삼아 형식을 ‘사상가’라고도 하고, ‘철학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별명에는 ‘너는 생각이나 하여라. 실지에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 하는 조롱의 뜻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별명을 듣는 형식은,
‘너희는 사상가가 무엇이며 철학자가 무엇인지를 아느냐’ 하고 비웃으면서도 그러한 별명이 아주 듣기 싫지는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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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사무실에 들어갔다. 벌써 상학종을 쳐서 교사들은 다 교실에 들어가고 배학감이 혼자 궐련을 피우고 앉았다가 형식을 슬쩍 보고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났으나 잠자코 분필통과 책을 들고 이층 사년급 교실에 들어갔다. 형식은,
“시간이 늦어서 미안하외다” 하고 반가운 듯이 교실을 둘러보았다. 희경이가 형식을 슬쩍 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다른 학생들도 빙글빙글 웃으며 형식을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돌아보기도 한다. 김종렬이가 혼자 웃지도 아니하고 점잖게 앉았다.
형식은 책을 펴서 책상 위에 놓고 교의에 걸어앉아서 수상한 듯이 일동을 본다. 형식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이 불쾌한 생각이 난다. 학생들의 태도가 암만해도 수상하다 하였다. 전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다. 오늘은 학생들의 태도에 자기를 비웃는 빛이 보인다. 그러나 형식은 웃으며,
“왜들 나를 보고 웃으시오…… 자 시작합시다. 제 십팔과…… 김군 읽어 보시오.”
학생들은 참다못한 듯이 한꺼번에, “와!” 하고 웃는다.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끽끽 하며 웃는다. 학생들의 등이 들먹들먹한다. 형식은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래서 발을 구르며 책망도 하고 싶고 소리를 내어서 울고도 싶었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서 엄한 목소리로,
“이게 무슨 일들이오? 무슨 버르장머리들이란 말이오?” 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 말소리는 떨렸다. 일동은 웃음을 그치고 모두 바로앉았다. 희경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연필로 책상에 무엇을 그적그적한다. 김종렬은 여전히 시치미떼고 앉았다. 형식은 차마 가르칠 생각이 없다. 가슴이 활랑활랑하고 숨이 차다. 자기가 사오 년간 전심력을 다 바쳐서 가르치던 자들에게 모욕을 받은 것 같아서 참 분하였다. 저편 교실에서는 수학을 강의하는 모양이더니 학생의 웃음 소리와 형식의 큰소리가 나자 갑자기 말이 끊어진다. 아마 이편 교실 모양을 엿듣는 듯하다. 형식은,
“무슨 일이오, 누구든지 말을 하시오. 학생들이 그게 무슨 행위란 말이오? 말을 하시오!” 일동의 시선은 김종렬에게로 몰린다. 희경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흔들흔들하면서 연필로 무슨 글자를 쓴다. 김종렬은 우뚝 일어선다. 학생들은 형식과 종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빙끗빙끗 웃기도 하고 서로 쿡쿡 찌르기도 한다. 어떤 자는 소곤소곤 이야기까지 한다. 형식의 머리터럭은 온통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였다. 종렬은 연설하는 사람 모양으로 한번 기침을 하더니,
“선생님, 한마디 질문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형식을 노려 본다. 형식은 ‘질문’이라는 말에 몸이 으쓱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이라도 상관없다 하는 용기도 난다. 그래서 종렬을 마주보며,
“무슨 질문이오?”
“선생님 그 동안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제가 질문이라 함은 그것을 가리킴이외다” 하고 자리에 앉는다. 일동의 시선은 형식의 입으로 모인다. 형식은,
“그래, 평양 갔다 왔소. 그래서? 그러니 어떻단 말이오?”
“무엇 하러?” 하고 어떤 학생이 혼자말 모양으로 묻자 다른 어떤 학생이, “누구하고?” 한다. 학생들은 또 한번 끽끽 웃는다. 또 어떤 학생이, “누구를 따라서?” 한다. 형식은 다 알았다. 종렬이가 다시 일어나며,
“평양은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학교를 쉬고 가시는 것을 보매 무슨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줄을 추측하기 비난합니다마는…….”
형식은 말이 막혔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자기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게 한참이나 가만히 섰다. 학생들은 또 웃는다. 누가, “계월향이 따라서 후후” 한다.
이때에 배학감이 쑥 들어오며,
“이선생, 왜 이렇게 교실이 소요하오? 다른 교실에서 상학할 수가 없구려” 하고 학생들을 돌아보며, “왜들 이렇게 떠드오?” 하고 돌아서서 나가려 할 적에 학생 중에서, “계월향!” 하고 소리를 지른다. 배학감은 형식을 한번 흘겨보고 문을 닫고 나간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학생들을 둘러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사 년간 교정이 이에 다 끊어졌소. 나는 가오” 하고 교실에 나왔다. 교실에서는 웃는 소리,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무실로 들어가 모자를 집어 들고 어디로 달아나리라 하였다. 그러나 배학감이,
“여기 좀 앉으시오그려” 하고 의자를 권하므로 아무 생각도 없이 의자에 앉아서 궐련을 끄집어내어 불을 붙였다. 배학감은,
“그 동안 어디 가셨어요?”
“녜, 평양 좀 갔다 왔어요.”
“아마 재미 많으셨겠습니다. 평양 경치가 좋지요?”
“노형은 나를 조롱하시오?” 하고 형식은 배학감을 흘겨보았다. 배학감은 웃으면서,
“아, 그렇게 성내실 것은 없지요. 남자가 기생을 좀 데리고 논다고 그렇게 흠할 것은 아니니까…… 다만 이선생님께서는 너무 고결하시니까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단 말이지요. 나는 계월향이가 이선생의 사랑하는 계집인 줄은 몰랐구려. 벌써 알았더면 그러한 실례는 아니하였을 것인데, 그렇게 계월향을 감추실 게야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도 그 얼굴이나 보고 소리나 듣게 해주시지요. 허허 참 복 좋으시오.”
“이기지심으로 탁인지심(以己之心度人之心)이로구려! 이형식이가 노형같이…….”
“흥, 무론 노형은 고결하시지요, 성인이시지요, 유하혜(柳下惠 : 신문관본에는 ‘백이숙제’로 바뀌어 있음―편자 주)시지요.”
형식은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고 교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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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운동장에 나섰다. 일년급 어린 학생들이 체조를 하다가 형식을 쳐다본다. 뚱뚱한 체조 교사가 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씻으면서 형식에게 인사를 한다. 형식의 생각에는 모두 자기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더구나 평생 배학감에게 아첨을 하여 가며 자기에게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가지던 체조 교사의 눈에는 확실히 자기를 조롱하는 빛이 있다 하였다. 그래서 형식은 ‘다시는 이놈의 학교에 발길을 아니하겠다’ 하면서 교문을 나섰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서는 한참 주저하였다. 자기가 사오 년 동안 집으로 알아 오던 학교와, 형제로 자녀로 아내로 사랑하는 자로 알아 오던 학생들을 영원히 떠나는가 하면 미상불 슬프기도 하였다. 그 운동장에 풀 한 대, 나무 한 가지가 어느 것이나 정들지 아니한 것이 없다. 저편 철봉 뒤에 선 십여 길이나 되는 포플러는 형식이가 처음 부임한 해에 자기의 손으로 심고, 자기가 날마다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 가며 기른 것이다. 그 포플러는 벌써 가지가 퍼지고 잎이 성하여 훌륭한 정자나무가 되었다. 예쁜 학생들이 낮에 그 나무 그늘에 앉아서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에 형식은 매양 기쁨을 깨달았다. 마치 자기의 마음이 그 포플러가 되어서 어린 학생들을 가리워 주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자기도 쉬는 시간에는 그 나무 그늘에서 거닐기도 하고 반가운 듯이 그 나무를 어루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형식은 간다. 그 나무는 점점 더 퍼져서 수없는 어린 학생들이 그 나무 그늘에서 여전히 즐겁게 노니련만, 다시 자기를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 형식은 고개를 돌려 한참 그 나무를 쳐다보며 창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차마 이 학교 문 밖에 오래 섰지 못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안동 네거리를 향하고 내려온다. 일기는 날로 더워 가고 하늘에는 구름장이 떠돌건마는 언제 비가 올 것 같지도 아니하다. 길 가는 사람들은 홰를 내어 부채질을 하고, 구루마꾼들은 흐르는 땀에 눈도 잘 뜨지 못한다. 파출소에 흰 복장 입은 순사가 추녀 끝 그늘에 들어서서 입으로 후후 바람을 내고 섰다. 그러나 형식은 더운 줄도 모르고 이따금 마주 오는 구루마를 비키면서 안동 골목으로 내려온다.
형식의 정신은 극히 혼란하다. 경성학교에 사직표를 제출할 것은 생각하나, 그 밖에는 어찌하여야 좋을는지 생각이 없다. 형식의 머리는 마치 물끓는 모양으로 부걱부걱 끓는다. 여러 날 정신과 몸이 피곤한데다가 지금 학교에서 극렬한 사격을 받았으므로 형식은 마치 열병 환자와 같이 되었다. 다만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머리를 내려누를 뿐이다.
아까 교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형식에게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불행한 사건이다. 형식의 전 희망은 그 사년급에 있었고 형식의 전 행복도 그 사년급에 있었다. 그 사년급이 있는지라 형식은 적막함이 없었고, 그 단순하고 무미한 생활 중에서도 큰 즐거움을 얻어 왔던 것이다. 그 사년급은 어떤 의미로 보아 지나간 사오 년간에 그의 재산이었고 생명이었었다. 또 그의 전심력을 다하는 사업이었었다. 그러고 그의 생각에 사년급 삼십여 명 학생은 영원히 자기의 정신적 아우와 아들이 되어, 마치 자기가 오매에 그네를 잊지 못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자기가 그네를 사랑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사랑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형식은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별로 친한 친구도 없으매, 그네를 그처럼 사랑하였거니와, 그네에게는 형식 외에 부모도 있고 형제도 있고 사랑스러운 동무도 있었다. 사오 년래 혹 형식을 따르는 학생도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가장 따르는 듯하던 이희경에게도 형식은 결코 중요한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었다. 형식은 이런 줄을 모르고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오늘에야 비로소 사년급 학생들의 눈에 비치인 자기를 분명히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여 오던 자가, 또는 자기를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거니 하던 자가 일조에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줄을 깨달을 때에 그 슬픔이 얼마나 할까. 아마도 인생의 모든 슬픔 중에 ‘사랑의 실망’에서 더한 슬픔은 없을 것이다.
형식은 정히 이러한 상태에 있다. 지금 형식에게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번 평양 갔던 일은 변명도 할 수 있으려니와, 그것을 변명하는 것은 형식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변명한다. 사년급 학생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한다는 진리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형식은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는 사람에게 셋째나 넷째로 귀중한 것이다. 형식은 지금은 목숨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생에 발 디딜 데를 잃고 공중에 둥둥 뜬 모양이다. 형식이가 아주 말라죽고 말는지, 다시 어디다가 뿌리를 박고 살는지 이것은 장래를 보아야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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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정신없이 집에 돌아왔다. 노파가 웃통을 벗고 마루에 앉아서 담배를 먹는다. 어깨와 팔굽이에 뼈가 울룩불룩 나오고 주름잡힌 두 젖이 말라붙은 듯이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두어 줄기 땀이 마치 그의 살이 썩어서 흐르는 송장물 같은 감각을 준다. 반이나 세고 몇 오리가 아니 남은 머리터럭과, 주름 잡히고 움쑥 들어간 두 뺨과, 뜨거운 볕에 시든 풀잎과 같은 그 살과 허리를 구부리고 담배를 먹는 그 모양,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준다. 그도 일찍 여러 남자의 정신을 황홀(케)하던 젊은 미인이었었다. 그의 생각에 천하 남자는 다 자기를 보고 정신을 잃은 줄 알았었다. 자기의 얼굴과 몸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리라 하였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가 불과 이삼십 년 전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몸에 있던 아름다움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가 흘리는 땀이, 즉 그 아름다움이 녹아내리는 물인 것 같다.